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센트 반 고흐 (문단 편집) === 요한나 반 고흐 - 봉허의 노력과 사후 재평가 === >소녀였을 때 나는 완벽하게 행복한 1년을 보내는 것이 같은 양의 행복을 평생에 걸쳐 나누어 느끼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내 소원은 이루어졌다. 내 몫의 행복을 만끽한 이상 이제 책임만이 남아 있다. >---- >아들 반 고흐 주니어가 인용한 어머니 요한나의 일기. 1928년. >아이가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부숨에 왔다. 그리고 우리 둘이 먹고 살기 위해 하숙생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그들을 돌봐야 한다. 하지만 빨래하고 청소하는 기계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끊임 없이 정신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테오는 내게 예술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아니,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고 함이 옳다. 그는 내게 아이 말고도 또 하나의 유산을 물려줬다. 빈센트의 작품. 나는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 가치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 테오와 빈센트가 평생 동안 모은 이 보물들을 아기를 위해서라도 잘 보존해야겠다. 그게 나의 일이다. >---- >요한나의 일기. 1891년 11월. 테오의 아내 요한나에게는 한 살이 안 된 아들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 테오는 아들에게 형 이름을 붙였다. 조카는 후에 인터뷰할 일이 있으면 삼촌의 이름을 피해서 자신을 '엔지니어'라는 별칭으로 불러달라고 하였다.]와 무명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수백점이 남았다.[* 빈센트 반 고흐는 10년간 900점 가량의 유화, 천 점 이상의 드로잉을 그렸다. 물감도 많이 쓰는 화풍이라 동생 테오의 지원이 대단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요한나는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할 수 있는 재원이었다. 테오와 친분이 있던 미술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고흐의 작품을 소개했고 1892년 네덜란드의 큰 화랑인 뷔파 화랑과 올덴젤 화랑에 고흐의 그림을 전시하는데 성공한다. >정말 대단한 밤이었다. 브라이트너, 이즈라엘, 얀 베트 등 내가 원한 모든 사람이 참석했다. 전시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모든 사람이 그림이 매우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 >요한나의 일기. 1892년 2월 26일. 사후 15년인 1905년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무려 484점의 작품을 전시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유럽 전역에서 평론가들이 찾아왔고 고흐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이 회고전 다음에 작품 가격이 2, 3배 올랐다고 한다. 1914년 빈센트와 테오의 무덤을 합장하며 두 사람의 형제애와 예술에 관한 열정을 알렸다. 1916년 미국으로 이동하여 3년 동안 전시회를 열며 고흐의 그림을 홍보했다. 요한나는 고흐의 그림을 알리기 위해 고흐가 남긴 편지를 정리해 책으로 출간했다. 663통의 편지 대부분 날짜가 없었기 때문에 요한나는 엄청난 시간을 들여 당시 일을 떠올리고 상황을 짐작하면서 순서를 정리했다. 1914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고흐의 명성이 올라가는데 기여했다. 요한나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영문판을 출간하는 것을 목표로 손수 번역하다가 526편의 번역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요한나의 예상대로 이 책의 영문판이 출간된 후 고흐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30년대부터 빈센트 반 고흐는 전세계적 인기를 가진 대중적인 화가가 되었다. 조카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는 물려받은 그림을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하여 1973년 '반 고흐 미술관'을 세웠다. 이곳은 현재 네덜란드의 대표 관광 명소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